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생존을 위해 비석과 소막을 주거지로 변모시켰던 피란민들의 지혜와 애환은 오늘날 부산만의 독특한 근현대 주거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01 / 산비탈 묘지 위에 세워진 아미동 비석마을
일제강점기 일본인 공동묘지였던 아미동 산비탈은 팍팍했던 피란 시절 축대와 기둥을 대신한 독특한 주거 터전으로 변모하였습니다.아미동 형성 배경
1950년 피란민들이 한꺼번에 유입되면서 평지의 기차역이나 국제시장 주변은 이미 천막과 판잣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더 이상 머물 공간을 찾지 못한 피란민들은 아미동 부산 산비탈 외곽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던 자리였습니다.비석과 석조물의 건축 자재화
집을 지을 목재나 벽돌이 턱없이 부족했던 피란민들은 버려진 비석과 묘지 석조물을 집의 축대, 계단, 문돌, 기초석으로 활용하였습니다. 부산 아미동 비석 마을이라는 이름은 이처럼 비석을 주거 자재로 활용한 절박한 생존의 흔적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골목길과 계단 밑, 담장 구석에서 당시의 비석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아미동 문화마을로의 변화
과거의 비극적 역사와 피란민들의 치열한 삶이 녹아 있는 이 공간은 현재 부산 아미동 문화 마을로 보존되어 피란수도 부산의 역사를 증언하는 대표적인 역사 문화 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02 / 소막 시설을 나눈 우암동 피란마을과 동암마을
우암동 피란마을은 일제강점기 수탈 목적으로 만들어진 소막 시설을 가마니와 가림막으로 나눠 주거지로 재활용한 공간입니다.소막의 주거지 변모
우암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소를 수탈해 일본으로 수출하기 전 검역하고 계류하던 '소막(소가 머무는 막사)' 시설이 밀집해 있던 곳이었습니다. 전쟁으로 거처를 잃은 피란민들은 비어 있던 소막 내부를 가마니나 얇은 판자로 구획을 나누어 한 동당 여러 가구가 나누어 살기 시작하였습니다.우암동과 동암마을 주변 환경
우암동 주변은 항구와 가까워 피란민들이 하역 작업이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기에 유리한 입지였습니다. 부산 동암마을을 비롯한 우암동 일대는 피란민들의 자생적인 노동과 삶이 집약된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소막이라는 산업 시설이 대규모 주거 공간으로 전환된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에 해당합니다.| 구분 | 부산 아미동 비석마을 |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동암마을 일대) |
| 원래 시설 | 일제강점기 일본인 공동묘지 및 화장장 | 일제강점기 가축(소) 검역 및 계류용 소막 |
| 주거 개조 방식 | 묘지 석조물·비석을 축대 및 계단 자재로 활용 | 소막 막사 내부를 판자와 가마니로 구획 분할 |
| 현재 역사적 의미 | 피란민의 생존력과 주거 문화 보존 (문화마을) | 등록문화재 지정 및 피란수도 상징 유산 |
03 / 피란수도 부산의 근현대 유산과 보훈 복지 신청
피란마을은 단순한 슬럼이 아니라 피란수도 부산이 품어낸 역사적 유산이자 국가적 보존의 대상이 되는 공간입니다.피란민들이 형성한 주거 문화는 오늘날 부산이 지닌 독특한 산복도로 지형과 도시 구조를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아미동 비석마을과 우암동 소막마을을 비롯한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들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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